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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11월3일 학생의날에
작성자운영자 작성일2017/08/24 23:43 조회수: 751 첨부(1)

2003년11월3일 학생의날에

2003년 11월 3일 학생의날 기념일에 22대 동창회 임원(22대 회장 김용님,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분)들이 
1회 최순덕 선배님(93세,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분)을 모시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 앞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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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선배님은 백지동맹 사건의 주역이시다.
여학생으로서 최대의 저항운동이었던 백지동맹을 이끌었던 최순덕 선배님은 국가보훈처로부터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나주통학열차 댕기머리 사건으로 알려진 이광춘 선배가 백지동맹 주역이라는 타이틀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최초 백지동맹은 1929년 11월 11일, 최순덕 선배님은 동급생 박지의 집에서 밤새 호소문을 작성하였다.
박지의 아버지는 당시 광주 부면장이었고 광주여고보 사친회장을 맡고있어 딸 박지가 연루된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자 했다.
이로인해 11월 17일 무기정학 후 이듬해 1월 퇴학처리로 사건이 일단락 되고 
언론보도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소녀회 활동도 하지 못하였다.

반면 유일한 여학생 조직이었던 소녀회 회원들은 일제의 광주학생사건 조사과정에서 발각되어 
박옥련 장매성 등 모든 회원들은 검거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후에 학생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퇴학 후 24년이 넘어서 1954년 11월 3일에야 전남여고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게되었다.
최순덕 선배님이 주도했던 1929년 11월 11일 최초의 백지동맹은 사라지고 
1930년 1월 9일 2차 백지동맹이 최초인듯 이광춘만 거론되었다. 
1999년과 2000년에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광주학생운동에 활동했던 이광춘을 비롯하여 박옥련 박지도 인정한 육성증언과 
각계인사들의 서명까지 제출했지만 왜곡된 사실은 뒤바뀌지 않았다. 
선배님께서는 사실 확인조사도 하지 않고 의문조차 갖지 않는 나라의 대응이 서글프다고 하셨다.
이 모든 상황을 알게된 전남여고 동창회 김용님 회장(31회)은 2005년 5월 3일 모교 교정에
기념식수 및 조그마한 표지석을 제작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선배님의 설움을 덜어드렸다.

* 2012년 8월 9일자 <광주전남여성운동사9, 광주학생 독립운동 참여한 꽃다운 소녀4> 
'백지동맹의 왜곡된 진실 바로잡기' 시민의소리 김다이 기자 기사내용 일부인용
2017년 8월 24일 운영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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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1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1회 최순덕 선배님은 2013년 103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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